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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비우스 안드로니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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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리비우스 안드로니쿠스는 기원전 3세기 로마 공화정 시대의 그리스 출신 극작가, 서사시인, 그리고 교육자였다. 그는 로마 문학의 선구자로,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를 라틴어로 번역한 '오두시아'를 저술했으며, 기원전 240년에는 로마에서 최초로 라틴어 희곡을 상연하여 로마 연극의 시작을 알렸다. 타렌툼 출신 노예였던 그는 해방 후 로마에서 활동하며, 그리스 문학을 로마에 소개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는 또한 제2차 포에니 전쟁 중 로마의 평화를 기원하는 찬가를 작곡하여 공적인 인정을 받았다. 그의 작품은 비극과 희극을 포함하며, 로마 연극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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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비우스 안드로니쿠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루키우스 리비우스 안드로니쿠스
원어 이름Λούκιος Λίβιος Ανδρόνικος (그리스어)
출생기원전 284년경, 타렌툼
사망기원전 204년경 (만 79세) 로마
직업작가, 극작가, 시인
언어라틴어, 고대 그리스어
국적고대 그리스
작품
주요 작품오디세이아 라틴어 번역

2. 생애

리비우스 안드로니쿠스는 마그나 그라에키아의 그리스 도시 타렌툼 출신으로, 로마로 끌려와 마르쿠스 리비우스 살리나토르 가문의 노예가 되었다가 해방된 인물이다. 그는 살리나토르의 아들들을 가르치는 가정교사였으며, 로마 최초의 그리스어 교사였을 가능성이 있다.

해방 이후 그는 로마 문학의 선구자로서 중요한 발자취를 남겼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를 고대 라틴어의 전통적인 운율인 사투르누스 문체로 번역하여 로마 최초의 서사시 작가로 평가받는다. 또한 기원전 240년경, 로마에 그리스연극을 처음으로 도입하여 상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19] 이는 로마가 제1차 포에니 전쟁에서 승리한 직후의 일로, 루디 로마니(로마 대제) 축제에서 라틴어 연극을 제작하고 감독했다. 당시에는 작가가 직접 배우로 출연하는 것이 일반적이어서 안드로니쿠스 역시 직접 연기했으나, 잦은 앙코르 요청으로 목소리가 쉬자 노예에게 노래를 대신 부르게 하고 자신은 연기에 집중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20]

기원전 207년, 제2차 포에니 전쟁 중 로마에 불길한 징조가 계속되자 국가적인 정화 의식을 위해 신관단의 요청으로 찬가를 작곡하기도 했다.[21] 같은 해 로마가 메타우루스 전투에서 승리한 후, 그의 공적을 기려 아벤티누스의 미네르바 신전에서 작가와 배우들의 조합(콜레기움)을 결성하고 봉헌할 수 있는 권리가 공식적으로 인정되었다. 이는 로마 사회에서 문학과 연극의 지위가 점차 높아지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2. 1. 출신과 노예 시절

리비우스 안드로니쿠스는 마그나 그라에키아(Magna Graecia)의 그리스 식민 도시 타렌툼(Tarentum) 출신이다.[8] 그는 교육을 잘 받은 그리스인이었으며,[8] 기원전 272년경 로마가 타렌툼을 점령했을 때 포로가 되어 로마 귀족에게 노예로 팔린 것으로 추정된다.[8]

그의 이름 중 '안드로니쿠스'는 그리스식 이름이며, '리비우스'는 그의 후원자(patronus)였던 리비아 가문(Livia gens)의 씨족명(gentilicium)에서 유래한 것으로 여겨진다. 고대 자료에서는 그를 리비우스 안드로니쿠스 또는 단순히 리비우스라고 부른다. 일부 기록에서는 그의 전칭명(praenomen)이 루키우스[9][10] 또는 티투스[14]였다고 언급하기도 한다.

그는 마르쿠스 리비우스 살리나토르에게 팔려가 그의 아들들의 가정교사가 되었다. 이후 그는 주인인 리비아 가문의 인정을 받아 해방 노예(libertus)가 되었다. 제롬은 그의 ''연대기''에서 리비우스 안드로니쿠스가 가르쳤던 리비우스 살리나토르에 의해 재능을 인정받아 자유를 얻었다고 기록했다.[14]

리비우스의 활동 시기, 특히 노예가 된 정확한 시점이나 해방된 시점에 대해서는 키케로[11][12]리비우스 등의 기록을 바탕으로 여러 견해가 존재한다.[13] 예를 들어 악키우스는 리비우스가 기원전 209년에 타렌툼에서 포로가 되었다고 주장했지만, 키케로는 이 견해가 플라우투스나 나에비우스보다 리비우스를 더 젊게 만든다는 이유로 동의하지 않았다.[11]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타렌툼 출신의 그리스인 노예였으며 리비우스 살리나토르 가문에서 가정교사로 일하다가 해방되었다는 점은 여러 자료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2. 2. 로마에서의 활동

마르쿠스 리비우스 살리나토르에 의해 해방된 후, 리비우스 안드로니쿠스는 로마에서 본격적인 문학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그리스 문학 작품을 라틴어로 번역하고 각색하여 로마 사회에 소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특히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를 고대 라틴어의 전통적인 운율인 사투르누스 문체로 번역하여 로마 최초의 서사시 작가로 평가받는다. 또한 로마 최초의 그리스어 교사였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키케로에 따르면, 리비우스 안드로니쿠스는 기원전 240년에 로마에서 최초로 라틴어로 된 연극을 상연했다.[11][12] 이는 엔니우스가 태어나기 한 해 전의 일로, 로마 연극사에서 중요한 시작점으로 여겨진다. 이 시기는 로마가 제1차 포에니 전쟁에서 승리한 직후였으며, 그의 옛 후원자였던 살리나토르 가문의 영향력 아래 루디 로마니(Ludi Romani, 로마 대제)에서 연극을 제작하고 감독할 기회를 얻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루키우스 악키우스는 리비우스가 기원전 209년에 타렌툼에서 포로로 잡혔고 기원전 197년에 연극을 제작했다고 주장했으나, 키케로는 이 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만약 악키우스의 주장이 맞다면 리비우스가 플라우투스나 그나이우스 나에비우스보다 후대의 인물이 되기 때문이다.[11][12][19] 현재로서는 기원전 240년과 기원전 207년의 활동 기록이 비교적 명확하게 받아들여진다.[13]

티투스 리비우스는 안드로니쿠스가 당시 다른 작가들처럼 직접 자신의 희곡에 배우로 출연했다고 전한다.[20] 그러나 잦은 앙코르 요청으로 목소리를 혹사하게 되자, 이후에는 노예에게 노래 부분을 맡기고 자신은 연기에만 집중하는 방식을 택했다고 한다.[20]

기원전 207년, 제2차 포에니 전쟁이 한창일 때 로마에 불길한 징조가 연이어 나타나자, 신들을 달래기 위한 국가적인 종교 의식이 필요해졌다.[21] 티투스 리비우스에 따르면, 이때 신관단(폰티펙스)의 결정에 따라 아홉 명의 처녀로 구성된 세 그룹이 도시를 행진하며 부를 찬가(파르테니온, parthenion)를 리비우스 안드로니쿠스가 작곡했다.[21] 공교롭게도 그 해의 집정관 중 한 명은 마르쿠스 리비우스 살리나토르(과거 그의 주인이거나 그 아들)였으나, 일부 학자들은 안드로니쿠스가 집정관과의 개인적인 관계보다는 자신의 실력과 명성으로 국가로부터 이 중요한 임무를 위탁받았을 것으로 본다.

같은 해 로마가 메타우루스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 후, 안드로니쿠스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특별한 영예가 주어졌다. 페스투스에 따르면, 아벤티누스에 위치한 미네르바 신전에서 작가와 배우들의 조합(콜레기움 scribarum histrionumque)을 결성하고 봉헌할 권리가 부여된 것이다. 이는 로마 사회에서 문학과 연극의 중요성이 점차 인정받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이 무렵 로마의 축제(루디)에서 상연되는 연극을 위해 작가와 배우 조합이 형성되고 그리스 연극의 기술이 도입되면서, 라틴어 연극 역시 점차 세련된 형태로 발전해 나갔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경향은 후대 작가인 플라우투스의 후기 작품들에서 요구되는 높은 수준의 연출과 연주에서도 확인된다.

3. 작품

리비우스 안드로니쿠스는 로마 문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인물로, 다양한 장르에 걸쳐 작품 활동을 펼쳤다. 그는 로마 최초의 서사시 번역가이자 극작가로서, 호메로스의 그리스 서사시 『오디세이아』를 고대 라틴어의 전통 시 형식인 사투르누스 운율로 번역했다. 이는 로마 문학 최초의 서사시 번역으로 평가받으며, 이후 라틴 문학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또한 기원전 240년경에는 로마에 처음으로 그리스 연극 형식을 도입하여 희곡을 상연했다. 이는 로마인들에게 정형화된 연극을 처음 선보인 사건으로 기록된다.

기원전 207년 제2차 포에니 전쟁 중에는 로마에 불길한 징조가 잇따르자 국가적인 정화 의식을 위한 찬가 작곡을 의뢰받았다[21]. 이 찬가가 성공적으로 공연되고 이후 로마가 메타우루스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그의 공적이 높이 평가받았으며, 이를 계기로 아벤티누스의 미네르바 신전에 작가와 배우 조합(''collegium scribarum histrionumque'')이 모여 활동할 수 있는 권리가 부여되기도 했다. 이러한 활동들은 로마 연극이 더욱 발전하는 토대를 마련하는 데 기여했다.

3. 1. 오두시아 (Odusia)

리비우스 안드로니쿠스는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를 사투르누스 운율을 사용하여 라틴어로 번역하였고, 이 작품을 Odusia|오두시아lat라고 명명했다. 이 번역은 본래 그의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한 목적이었으나,[7] 로마인들이 그리스의 기본적인 서사시에 접근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으며, 라틴 문학 문화 발전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7] 이는 작품 자체로 즐길 수 있도록 만들어진 예술적 과정으로서의 번역의 초기 사례 중 하나로 평가받으며, 리비우스는 원작의 예술적 가치를 보존하고자 노력했다.[7] 또한, 당시 이탈리아에는 서사시 전통이 부재했기에, 그는 언어에 장엄함과 강렬함을 더하기 위해 고풍스러운 표현을 사용하는 등 새로운 시도를 해야 했다.[13] 그의 이러한 혁신은 이후 라틴 시문학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13]

『오두시아』는 완전한 형태로 전해지지 않으며, 원작 24권 중 17권에서 발췌된 46행의 단편만이 남아있다.[7] 남아있는 단편들을 통해 볼 때, 리비우스는 일부 구절에서는 원문에 충실하게 직역했지만, 다른 부분에서는 내용을 보다 자유롭게 번역하는 유연성을 보였다.[7] 그는 번역 과정에서 원작의 의미를 명확하게 전달하고자 노력하면서도, 라틴 문화나 정서에 맞지 않는 부분은 수정해야 했다.[15] 예를 들어, 로마인들에게는 받아들여지기 어려웠을 "신과 같은"이라는 표현은 '가장 위대하고 으뜸가는'이라는 의미의 summus adprimuslat로 변경되었다. 또한, 그는 초기 로마 시의 특징인 파토스(pathos), 표현력, 극적 긴장감 등을 고려하여 호메로스의 작품을 해석하려는 경향을 보였다.[15]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반적으로 리비우스는 원문을 임의로 바꾸기보다는 호메로스라틴어 모두에 충실하고자 노력했다.[16]

3. 2. 희곡

로마 시대 연극 장면의 프레스코화


키케로는 리비우스 안드로니쿠스의 첫 연극 상연 시점에 대해 기원전 240년 설과 기원전 209년 설 두 가지를 소개하고 있다[19]. 리비우스는 그가 로마에서 처음으로 줄거리가 있는 연극을 만들었다고 전한다. 배우이기도 했던 리비우스는 공연 중 목소리를 너무 많이 사용한 후, 처음으로 노래는 가수에게 맡기고 배우는 대화에만 집중하도록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20].

그의 희곡 작품은 이암보스 세나리우스와 트로카이오스 셉테나리우스 운율로 쓰였다. 이 작품들은 서정적인 노래 부분(칸티카)과 대화 부분(디베르비아)을 모두 포함했다. 특히 그 자신이 주연 배우로 자주 등장했기 때문에, 독백 부분이 많은 특징을 보였다. 그의 연극에 합창단이 있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리비우스의 희곡들은 고대 그리스 연극의 형식을 따랐으며, 아마도 그리스 작품들을 모델로 삼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그의 희곡은 다른 작가들이 인용한 60개 미만의 짧은 단편들만 남아 있다.

그가 쓴 것으로 알려진 비극의 제목은 『아킬레우스』, 『아이기스투스』, 『아이아스 마스티고포루스(채찍을 든 아이아스)』, 『안드로메다』, 『안티오페』, 『다나에』, 『에쿠스 트로이아누스』, 『헤르미오나』, 『테레우스』 등이다.

희극으로는 『글라디올루스(작은 검)』와 『루디우스』 두 편의 제목이 확실히 전해지며, 세 번째 제목인 『비르고』는 아마도 잘못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이 희곡들은 모두 그리스의 신희극을 모델로 하여 그리스 이야기를 각색한 것이다. 로마인들은 리비우스와 그의 후계자들이 각색한 이러한 종류의 희극을 배우들이 입었던 짧은 망토인 '팔리움'에서 유래한 ''파불라 팔리아타'' 또는 ''코모에디아 팔리아타''라고 불렀다[17]. 안드로니쿠스의 ''팔리아타'' 희극 중에서는 『글라디올루스』의 제목과 함께 각각 한 줄로 이루어진 여섯 개의 단편만이 남아 있다.

기원전 207년, 제2차 포에니 전쟁로마에 흉조가 잇따르자, 신관들의 결정에 따라 정화 의식을 위한 노래를 작곡하기도 했다. 이 노래는 아홉 명의 처녀로 구성된 세 그룹이 불렀다고 티투스 리비우스는 전한다[21]. 이후 메타우루스 전투에서 로마가 승리하자,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아벤티누스 언덕의 미네르바 신전에서 작가와 배우 조합(콜레기움)이 모여 봉헌할 권리가 주어졌다고 페스투스는 기록했다. 당시 콘술 중 한 명이 마르쿠스 리비우스 살리나토르였지만, 그의 영향력 덕분이 아니라 실력으로 국가로부터 의뢰를 받았다는 견해도 있다. 이러한 활동들은 로마 연극이 플라우투스 시대에 이르러 더욱 발전하는 데 기여한 것으로 평가된다.

3. 3. 찬가

기원전 207년, 제2차 포에니 전쟁 중 로마에 불길한 징조가 연이어 나타나자, 이를 정화하기 위한 특별한 의식이 필요하게 되었다. 티투스 리비우스의 기록에 따르면,[18] 신관들은 27명의 소녀들(9명씩 세 그룹으로 나뉘어)이 유노 여신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며 도시를 행진하는 정화 의식을 거행하기로 결정했다.[21]

이 중요한 국가적 행사에 사용될 찬가를 작곡하는 임무는 리비우스 안드로니쿠스에게 맡겨졌다. 그가 작곡한 찬가는 성공적으로 공연되었으며, 이는 단순한 종교 의식을 넘어 그의 문학적 재능을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로마가 메타우루스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자, 찬가의 성공과 더불어 리비우스 안드로니쿠스의 공적이 높이 평가받았다. 역사가 페스투스에 따르면, 그의 공로를 기리기 위해 국가에서는 그가 속한 작가 및 배우 조합(''collegium scribarum histrionumque'')에게 아벤티노 언덕에 위치한 미네르바 신전 내부에 장소를 마련해주고, 그곳에서 모임을 갖고 봉헌물을 바칠 수 있는 특별한 권리를 부여했다. 이 신전 내 공간은 이후 로마의 작가와 배우들이 함께 모여 교류하고 그들의 수호신에게 감사를 표하는 중심지가 되었다.[18]

흥미로운 점은 기원전 207년 당시 콘술(집정관) 중 한 명이 마르쿠스 리비우스 살리나토르였다는 사실이다. 그는 리비우스 안드로니쿠스를 노예 신분에서 해방시켜 준 인물이거나 혹은 그의 아들일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일부 현대 학자들은 리비우스 안드로니쿠스가 이러한 개인적인 인연 덕분이 아니라, 순수하게 그의 뛰어난 능력과 명성을 인정받아 국가로부터 찬가 작곡이라는 중요한 임무를 위임받았을 것이라고 분석한다. 이는 당시 로마 사회가 점차 개인의 재능과 기여를 중요하게 평가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해석될 수 있다.

4. 평가 및 영향

리비우스 안드로니쿠스는 로마에 그리스 문학과 연극을 본격적으로 도입한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그는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를 고대 라틴어로 번역하여 로마 최초의 서사시를 선보였으며, 기원전 240년경 그리스식 연극을 처음으로 상연하여 로마 연극의 기틀을 마련했다[19]. 이러한 활동은 초기 로마 문화가 그리스의 영향을 받아 발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또한 그는 제2차 포에니 전쟁 중 국가적인 정화 의식에 필요한 노래를 작곡하는 등[21] 공적인 활동에도 기여했으며, 이를 계기로 아벤티누스 언덕의 미네르바 신전에서 작가와 배우들이 모여 콜레기움(조합)을 결성하고 활동할 권리를 얻는 데 영향을 미쳤다. 이는 로마에서 연극 전문가 집단이 형성되고 라틴어 연극이 더욱 발전하는 기반이 되었다. 그의 업적은 후대 플라우투스와 같은 작가들의 활동으로 이어지며 로마 문학 및 연극 발전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4. 1. 로마 문학의 선구자

코그노멘으로 보아 그리스 출신 노예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시빌의 서를 관리하는 10인 위원 중 한 명이었던 마르쿠스 리비우스 살리나토르에게 팔려 남부 이탈리아(마그나 그라에키아)의 그리스 도시 타렌툼에서 로마로 옮겨왔고, 그곳에서 살리나토르 아들들의 가정교사가 되었다가 이후 해방되었다. 이는 기원전 272년 로마가 타렌툼을 점령했을 때 포로로 잡혔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그는 로마 최초의 그리스어 교사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안드로니쿠스는 로마 최초의 서사시를 쓴 시인이기도 했다. 기원전 240년에는 아직 문화적으로 세련되지 못했던 로마인들에게 형식화된 연극, 즉 그리스식 극을 처음으로 선보인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는 고대 라틴어의 초기 시 형식인 사투르누스 운율을 사용하여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를 번역했다.

키케로에 따르면, 안드로니쿠스의 첫 공연 시기에 대해서는 엔니우스가 태어나기 전 해인 기원전 240년이라는 설과 기원전 209년이라는 설이 있다[19]. 기원전 240년은 로마가 제1차 포에니 전쟁에서 승리한 직후로, 안드로니쿠스는 아마도 옛 주인이었던 살리나토르의 영향력을 통해 로마 대축제(루디 로마니)에서 상연될 라틴어 연극을 제작하고 감독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티투스 리비우스는 당시 다른 작가들처럼 안드로니쿠스도 직접 자신의 희곡을 연기했는데, 관객들의 앙코르 요청에 너무 많이 응하다가 목이 쉬어버렸다고 기록했다. 이후 그는 노예에게 노래를 대신 부르게 하고 자신은 연기에만 집중했다고 한다[20].

기원전 207년, 제2차 포에니 전쟁 중 불길한 징조가 계속되자, 신관들은 정화 의식을 거행하기로 결정했다. 티투스 리비우스에 따르면, 이때 9명의 처녀로 이루어진 세 그룹이 도시를 돌며 부를 노래를 작곡한 사람이 바로 안드로니쿠스였다[21]. 이후 로마가 메타우루스 전투에서 승리하자,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아벤티누스 언덕의 미네르바 신전에 작가와 배우 조합(콜레기움)을 만들어 봉헌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졌다고 페스투스는 기록했다. 이 해의 집정관 중 한 명이 마르쿠스 리비우스 살리나토르(안드로니쿠스의 옛 주인이거나 그의 아들)였지만, 일부 학자들은 그가 살리나토르와의 관계 덕분이 아니라 순전히 실력으로 국가로부터 의뢰를 받았다고 보기도 한다.

이 시기를 거치며 로마의 축제(루디)에서 공연되는 연극을 위한 작가와 배우 조합이 생겨났고, 그리스 연극 기술이 도입되면서 라틴어 연극 역시 점차 세련되어 갔다. 이는 그리스의 전문 극단과 유사한 발전 과정이었다. 플라우투스의 후기 작품인 『카시나』나 『프세우돌루스』 등에서 수준 높은 연출과 연주가 요구되었다는 점에서도 이러한 경향을 엿볼 수 있다.

4. 2. 후대에 미친 영향

리비우스 안드로니쿠스는 로마 문화, 특히 문학과 연극 분야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로마 최초의 그리스어 교사였을 가능성이 높으며, 이를 통해 로마에 그리스 문화를 소개하는 데 기여했다. 또한 호메로스오디세이아를 고대 라틴어의 사투르누스 문체로 번역하여 로마 최초의 서사시를 선보였다. 이는 라틴 문학 발전의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

기원전 240년, 제1차 포에니 전쟁에서 로마가 승리한 직후, 안드로니쿠스는 로마인들에게 그리스 형식의 연극을 처음으로 소개했다[19]. 이는 로마 연극 역사의 시작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직접 배우로 활동하기도 했으며, 목소리가 쉬자 노예에게 노래를 대신 부르게 하고 자신은 연기에 집중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20].

제2차 포에니 전쟁 중인 기원전 207년에는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정화 의식에 사용될 노래를 작곡하기도 했다[21]. 이 공로와 메타우루스 전투에서의 로마 승리 이후, 안드로니쿠스를 기리기 위해 아벤티누스 언덕의 미네르바 신전에서 작가와 배우 조합(콜레기움)이 모여 봉헌할 권리가 주어졌다. 이는 로마에서 연극 전문가 집단이 형성되고 그리스 연극 기술이 도입되어 라틴어 연극이 더욱 세련되는 계기가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후대 작가인 플라우투스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고도의 연출과 연주는 이러한 발전의 결과로 볼 수 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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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서적 로마建国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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